거북배는 1592년(임진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 장군이 창제한 싸움배인데 그 형태, 구조, 성능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장차 왜적의 침입을 염려하여 따로 전선 크기만 한 배를 만들었는데 배 위를 둥그스름하게 판자를 덮고 그 위에 창칼을 꽂았다.
적군들이 배에 기어오르거나 뛰어 내리면 그 창칼에 찔려 죽게 된다. 배의 앞에는 용머리를 딜고 그 용의 입을 통하여 대포알을 쏘았다. 뒤에는 거북꼬리를 달고 총구를 냈다. 배의 좌우에는 각각 6개의 대포 구명을 냈다.
거북배에는 돌격장이 타고 함대의 선봉이 되어 나아간다. 적이 에워싸고 덮치려 하면 일시에 대포를 쏘아 가는 곳마다 휩쓸어 임진왜란의 크고 작은 해전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모습이 엎드린 거북과 같으므로 「거북배」라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거북배의 구조에 대한 자세한 설계도나 치수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장계, 그리고 조카인 이분의 행장, 몇 가지의 단편적인 자료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거북배라는 이름은 조선왕조 『태종실록』에 처음 나온다.
태종 13년 2월에 "왕이 임진나루를 지나가다가 거북배와 왜선으로 꾸민 배가 수전 연습을 하는 것을 보았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태종 때의 거북배는 평전선만이 있을 때였으므로 임진년의 거북배와는 그 구조가 달랐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이름만이 같은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97년 뒤인 1795년에 편찬한 《이충무공전서》가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통제영거북배와 전라좌수영거북배의 45도 투시도와 치수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거북배의 생김새와 만듦새, 전투 성능과 각 구조의 기능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익한 자료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순신이 창제한 거북배의 생김새와 만듦새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창제한 거북배 치수는 다음 표와 같다.
자료이름 | 연대 | 배 밑의 길이 |
---|---|---|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 | 1592~1815 | 10발 |
이충무공 종가소장 거북 배 그림 | 1600~1800 | 10발 |
여암전서(旅菴全書) 병선론 | 1712~1782 | 10발 |
본장 제 2절 제 3항
「이순신 장군이 창제한 임진거북배」 란에서는 거북배의 모양과 성능에 대하여 간단히 기술했으나, 본 항에서는 각종 사료를 토대로 거북배를 만든 시기와 구조 등을 추정해 본다.
임진년(1592) "난중일기"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음력),
전선을 새로 만드는데 1척당 최소 6월간의 일정이 필요하다.
대체로 보아 벌목은 입추 후부터 입춘 사이에 하게 되는데, 거북배에 사용할 목재는 1591년 가을걷이가 끝난 후, 즉 농번기가 끝난 후 벌목을 하는 시기에 마련하고 이어서 착공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순신 수사는 임진년 2월 19일부터 2월 26일까지 예하 5관 5포를 순시한 바 있다. 이때 무기의 수리정비와 새 전함의 조선을 확인하고 새로 조선한 전함에서 함포의 방포시험도 하였다.
이순신 수사가 좌수영 본영에서 새로 조선한 거북배는 임진년 2월 26일경에 선체 및 상장을 완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순신 수사가 창제한 거북배의 만듦새는 어떠한 것이었으며 왜적과는 어떻게 싸웠을까?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이분이 쓴 《이충무공행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에 있을 때 왜구가 꼭 쳐들어 올 것을 알고 본영 및 예하에 속해있는 각 진의 무기를 수리하고 정비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쇠고리를 만들어서 앞바다에 가로질러 매었다. 또 전선을 새로 발명하여 만들었는데 크기는 판옥전선과 같고 잔등판 위에는 열십자의 좁은 길을 내어놓아 사람이 잔등 이를 다니기 쉽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칼 송곳을 꽃아서 적이 발을 디딜 곳이 없게 하였다. 이물에는 용의 대가리를 만들어 닮았으며 아가리는 대포구멍이 된다. 고물은 거북의 꼬리가 디는 데 꼬리 아래에 대포구멍이 있다. 배의 바른쪽과 왼쪽의 방패에 각각 여섯 개의 대포구멍이 있다. 대체로 그 생긴 모습이 거북의 모양과 같으므로 해서 그 이름을 거북배라고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197년 뒤인 1795년에 편찬한 《이충무공전서》가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통제영거북배와 전라좌수영거북배의 45도 투시도와 거북배의 구조 및 성능에 대한 설명과 치수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1592년에 이순신 수사가 창제한 거북배의 형태와 구조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정조 19년(1795)에 편찬한 《이충무공전서》의 책머리에 통제영 거북배와 전라좌수영 거북배의 그림과 설명이 있다.
모두 694자로 되어 있는데 거북배의 주요 치수와 만듦새, 성능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배 밑은 10쪽을 이어 붙였는데 길이는 20.2cm이고 머리쪽(이몰)너비는 3.7m, 허리(한판)의 너비는 4.5m, 꼬리쪽(고물)너비는 3.3m이다. 좌우 삼판은 각각 7쪽을 이어 올렸는데 높이는 2.3m가 된다.
맨 아래 첫째판(부자리)의 길이는 21.2m이고, 차차 길어져서 맨 위 일곱째 판의 35.3m가 된다.
두께는 다같이 0.13m이다. 이몰비우는 가로다지로 4쪽을 이어 붙였?f데 높이는 1.2m이고 둘째 판 좌우에 현자대포구멍을 각각 1개씩 뚫었다. 고몰비우는 가로로 7장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2.3m이고,
위쪽 너비는 4.5m, 아래쪽 너비는 3.3m 이다. 여섯째 판 가운데에 직경 0.37m가 되는 구멍을 뚫어 키(치)의 킷다리를 꽂았다.
좌우 뱃전 밖으로 빠져나온 멍에 발목위에 신방(도리)을 걸고 신방 머리쪽에 멍에(덕판)를 가로로 걸쳤는데 바로 이몰(뱃머리)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인 것 같다.
신방을 따라가면서 안쪽으로 널판때기(포판)를 깔고 신방 이에 기둥을 세우고 방패를 둘러 세웠다. 방패 위에 또한 안방(살림집의 창방도리와 같음)을 걸었는데 신방(현란)에서 언방(패란)까지의 높이는 1.3m이다.
언방(패란)의 좌우에서 안쪽으로 각각 11장의 거북 잔등판을 겹쳐서 올려 덮었다. 그 잔등에는 0.47m의 틈(등골)을 내어서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뱃머리(이몰)에 거북대가리(용대가리)를 닮았는데 길이는 1.3m, 너비는 0.94m가 된다. 안에서 유황과 염초를 태워 입을 벌려서 마치 안개처럼 연기를 토함으로써 적을 혼미케 하였다. 좌우에 노가 각각 10척씩 있고, 배의 좌우에 각각 14개의 방패가 있다. 그 방패에 각각 22개의 대포구멍을 뚫었고 또 각각 12개의 문을 냈다.
뱃머리(이몰)의 거북대가리(용대가리) 위쪽에 2개의 대포구멍이 있고 거북대가리 아래에 2개의 문을 내었다. 문 옆에 각각 1개씩의 대포 구멍이 있다. 거북 잔등판 좌우에도 각각 12개의 대포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거북 『귀』자의 깃대를 꽂았다. 배의 좌우 포판(겻집:마루)아래 선창에 방이 각각 12칸이 있는데 2칸은 철물을 쌓아두고 3칸은 대포와 활, 화살, 창, 검등을 나누어 재어 놓았으며 나머지 19칸은 병사들이 휴식하는 곳이다.
배 위 고물의 왼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칸은 선장실이고, 오른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칸은 장교실이다. 병사들이 쉴 때에는 포판 아래 선창의 선실에서 쉬고 싸울 때에는 포판 위로 올라와 모든 대포 구멍에 대포를 걸어놓고 끊임없이 쟁이고 놓아댄다.
전라좌수영 거북배의 길이와 너비등의 치수는 통제영 거북배와 거의 같으나 다만 거북대가리(용대가리)아래에 귀신의 머리를 더 달았다. 거북 잔등판 덮개위에는 거북무늬를 그렸고, 좌우에 각각 문이 2개씩 있다. 거북대가리 아래에 대포구멍이 하나씩 있고 좌우 방패에 각각 10개의 대포구멍이 있으며, 잔등판 덮개 좌우에도 대포구멍이 6개씩 있다. 좌우 뱃전에는 노가 8척씩 있다. 거북배를 찬양한 시가 있는데, 그 내용에 임진년 전라좌우셩에서 만든 거북배의 치수와 구조를 밝혀주는 구절이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선박인 한선의 조선기술을 기본으로 하여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느 1795년식, 거북배의 과학적 설계및 구조 계획에 대하여 알아본다. 《이충무공전서》의 권두에 기록되어 이슨 「통제영귀선」의 안설 내용 중 1795년식 거북배의 치수를 가지고 전통한선의 설계기법을 응용하여 풀이하면 아래와 같다.